미륵에대한 연구 / 논문2

미륵사상과 신앙2

미륵사상을 확립한 '無着菩薩'의 영험은 생생하다.

무착은 불멸 후 900년경에 북인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일찍이 불교를 배울 적에 당시 성행하던 '미륵신앙'을 독실히 지니고 미륵님을 친견하기 위해서 기도를 드렸다. 12년간이나 일심으로 미륵기도를 하였으나, 미륵님의 감응을 얻지 못하고 인연이 없음을 탄식하고 산을 내려 오는 데, 어느 마을에서 온 몸에 벌레가 우글거리는 병든 개 한 마리를 보았다
그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어서 손으로 그 벌레를 모두 떼어내니 그 벌레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마을에서 밥을 빌어다가 개도 먹이고 벌레에게도 먹이었다. 그러자 개는 밥을 먹고는 푸른 사자로 화하여 껑충 뛰어 가는데 7보관을 쓴 보살 한 분이 그 사자를 타고 광명을 발하면서 무착에게," 장하다 선남자여, 그대의 정성을 시험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정진하게 하였고,또 너의 자비심을 시험하려고 병든 개를 나타내어 보이었느니라. 다시 만나게 되리라." 하고는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무착은 허공을 향하여 무수히 예배하고 다시 기도하던 산에 돌아가서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미륵님'이 계시는 도솔천궁이 환히 나타나고,또 '미륵님'이 설법하시는 것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 때부터 무착보살은 '미륵님'에게 들은 법문을 그대로 기억하고, 그것을 다시 글로 써낸 것이 "요가사지론(요伽師地論)"등이다. 그리하여 미륵사상을 근본으로 한 "요가유식학(요가유식학))"이 구체적으로 조직되어 후세에 '요가학파'가 되고 "유가학, 법상종(法相宗)"이 되었다.

이후 이러한 미륵영험은 중국, 한국, 일본을 통해서 무수히 전개되었고 그 신앙은 깊숙히 민중가운데 정착하게 되었다.

특히 우리 나라 에서는 불교가 전래되어 오면서 미륵신앙이 민중화되어 지금도 시골 논, 밭둑에서 가끔 돌로 깍아 만든 미륵불상을 보게 된다. 이 미륵신앙은 삼국시대를 비롯하여 고려,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민중의 해원사상(解院思想)으로 발전하여 갔던 것이다.

신라의 '화랑'을 '미륵선화'라고 하였고 또 화랑의 낭도를 '龍華香徒'라고 한바 용화는 곧 미륵님의 세계라는 뜻이며, 향도는 '용화교주 미륵님'께 향을 사르는 교도라는 뜻이니 미륵신앙의 인연이 국가적 시책에 까지 반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라는 두 도인의 현신성불(現身成佛)이야기가 나온다.'박박'은 아미타불을 지성으로 염불하고, '부득'은 '비륵불'을 지성으로 염불하여 도를 닦았다.

어느 날 관세음보살의 화현인 환 여인의 산기(産氣)를 도와주고, 그 여인이 목욕한 물로 여인이 권하는 대로 목욕을 하자 몸이 금빛으로 변하고 연꽃이 솟아나면서 부득이 먼저 미륵불로 화현했다는 이야기다.

즉 이러한 화랑과 현실성불의 이야기는 우리의 신앙이 단지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신앙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륵님이 곧 '現人身'으로 구현된다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자세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더욱 백제시대의 미륵신앙은 더한층 구체적이고 적극적이어서 이 땅위에 곧 미륵불의 '용화세계'를 실현한다는 형태였다. 백제의 미륵사는 36년간이나 국력을 다하여 지은 절로서 '미륵삼존'을 모시고 용화세계의 '삼회설법'을 그대로 사회적으로 구현하겠다는 의지를 정책에 실현하였다.

이런 점에서 신라의 미륵신앙은 인격적인 구현을 그 이상으로 하였고, 백제의 미륵신앙은 국토적인 구현을 그 이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